바우하우스가 현대 예술에 미친 영항
1919년 4월, 발터 그로피우스를 통해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가 창립되었다. ‘모든 조형 활동의 궁극적 목적은 건축이며, 건축을 이룩하는 일이 과거의 조형예술의 지고의 과제였으며, 조형예술은 대건축 예술에 떼어 놓을 수 없는 구성요소이다...’ 그로피우스의 선언문을 접한 미술학교의 생도였던 젊은이들은 바우하우스로 몰려 왔다. 그로피우스는 예술가와 수공예가의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구별이 없다고 생각하여 모든 공작예술 부문 조각, 회화, 공예의 재통합을 꾀하였다. 즉 바우하우스의 최종적인 목표는 기념비적 예술과 장식예술과를 구별하지 않는 통일예술. 대건축이었다. 통합예술을 구현하기 위해 수업은 노작 배분 계획으로 이루어 졌다. 노작 배분 계획은 도제를 위한 과정, 직인을 위한 과정, 젊은 마이스터를 위한 과정, 이 3가지 과정으로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이 모두 다른 과정의 일부에 참가 할 수 있도록 짜여졌다. 이는 예술교육에 있어 오늘날의 교육방식과 차이를 보인다. 오늘날의 예술교육은 고등교육 이후에 대학교육으로 학과 별로 나누어져 있으며, 학생들을 건축가로 양성하기 위한 건축학과와 화가를 양성하는 회화과 등으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운영된다. 과거 바우하우스에서의 연수자는 3가지 과정을 통해 다방면의 포괄적인 기술적 예술적 훈련을 부여 받는 것이 가능했으나, 오늘날의 예술교육은 한 가지의 전문성만을 고집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바우하우스에서 가장 혁신 적인 교사를 꼽자면 요하네스 잇텐이 있다. 그는 학생에 대한 기초적 조형교육의 필요성을 제안하여 1학기 동안의 예비과정을 교수하는 일을 맡았다. 잇텐의 기발한 방침은 학생의 창조력과 예술적 재능을 해방시키는 일, 낡은 관습으로부터 떨어져 자기의 체험과 인식에 기초한 작품을 만들게 하는 일, 학생의 직업 선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형태와 색채에 관한 조형의 기본원칙을 깨우치게 하는 일이었다. 즉 참신한 조형을 이루기 위해서 항조적인 인간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조형 활동을 행하기 위한 기초적인 감성과 지성과 상상력을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둔 잇텐의 예비교육은 당시의 젊은이들의 좋은 디자인에 대한 사고의 폭을 확장시켜 주었으며 오늘날 디자인 발전의 다양한 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에 영향을 준 바우하우스의 도전적인 시도에 대해서 브륵하르트는 ‘바우하우스를 수용하지 않고서는 디자인의 역사는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구래의 미술학교와 공예학교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바우하우스가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의 교육 및 실천의 기관으로서의 전개를 보인 시기는 1923년 바우하우스전이 개최되면서 부터이다. 전람회에는 독일, 네덜란드, 체코, 덴마크, 러시아 ,프랑스, 제국의 자하리히 경향의 현대 건축 작품이 소개되었다. 여러 건축 작품 중 요스트 슈미트의 4개의 추상적, 구성주의적인 부조는 복잡한 형태의 입체 기하학적인 벽면 부조로 조명기구를 경하고 있어서 매우 신선한 공간을 보여줬다. 전람회 이후 그로피우스는 예비교육, 공작교육, 건축교육, 무대교육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는 처음으로 건축교육이 구체적으로 짜여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었다. 건축에 대한 흥미는 수공마이스터와 직인의 중심이 되어 건축연구회가 결성되어 많은 설계와 연구가 진전 되어졌다. 1924년 바우하우스의 역사상 가장 창조적 기분이 만연할 때, 주목할 만한 것은 활판 인쇄에 기초한 그래픽 디자인의 연구였다. 이를 추진한 사람은 모흘리 나기 였으며 이후의 서적디자인에 한 시기를 긋게 되었다. 모흘리 나기의 문자디자인은 활자를 읽기 쉽게 개량함과 동시에 대문자와 소문자의 구별을 없앤 통일문자로 많은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비단 문자뿐 아니라 오늘날의 이른바 그래픽 디자인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구조적, 기능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서, 모흘리 나기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현대 그래픽 디자인의 이론적 배경으로서의 가장 첨단적인 예를 이루는 것이었다. 창립 9년 후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떠나자 마이어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 마이어는 그로피우스의 이념을 계승하여 바우하우스의 조직을 변경하였다. 바우하우스는 곧 전문공과대학의 성격을 보이게 되었다. 이때부터 건축에서의 관심사 또한 중세적인 대건축에서 벗어난다. 건축설계의 목표는 개인의 생활 근거인 주택과 공중의 복지를 위주로 하는 도시계획에 있으며, 그 관념적인 계획보다는 현실에 위탁된 문제의 해결이 우선시되었다. 이점에서 건축교육과정의 주임이 된 힐버자이머는 최적임자였다. 그는 집단주택과 도시계획의 전문으로서 이 방면의 지도에 임하는 한편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공존하는 집단주택가의 연구나 도시계획 구상을 발표하였다. 이는 전대와는 현저히 대조적인 것이었다. 바우하우스가 교육기관으로서 굳건한 입지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32년은 완전히 수난의 해가 되었다. 반유태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나치스는 바우하우스 내 유태인들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해산을 강요하였다. 전력을 다해 왔던 바우하우스는 베를린 경찰과 나치스돌격대에 의해 봉인되었고, 해산되어 재개가 불가능해졌다. 이후 모흘리 나기는 미국에 망명하여 당시 하버드대학의 건축과 교수가 되어 있던 그로피우스를 고문으로 NEW BAUHAUS AMERICAn SCHOOL OF DESIGN을 발족시켰다. 이것은 나중에 institude of design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952년에는 일리노이공과대학에 합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2차대전후 독일의 울름에서는 1951년부터 뉴 져먼 바우하우스가 뎃사우, 바우하우스 출신인 막스 빌에 의하여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존립기간은 짧았지만, 그것이 미술교육에 미친 영향은 혁명적인 것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디자인은 자유로운 조작을 의미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현실을 향하여 제약되어진 조작을 의미하고 있다. 산업과 접촉하여 디자인의 사회화 운동에 기본이 되는 교육적 성취를 선취하고자 했던 선각자- 모리스와 그로피우스의 디자인관이 왜 현대에 와서도 강력한 것이 될 수 있었을까? 바우하우스에서 제품을 생산하였던 것은 수공예적이든 기계적인 종류이든 화려한 것을 추구하였던 것이 아니라 바로 가장 폭넓게 확산되어있는 서민들의 욕구를 충족 시켜주는 것에 그 목표를 두었다. 바우하우스의 노력들은 단지 새로운 조형을 생산하려는 것 보다, 제품을 사용하는 사용자 중심에서의 디자인을 생산하였으며,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하였던 문화운동으로 평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조형. 오브젝트를 사용과정에서 기능적인 문제, 또는 사용자와의 정신적인 관계 그리고 제품이 사용되는 환경적인 맥락들과의 조화를 통해 생성 되는 것이며 오늘날 우리들이 평가하는 진정한 조형은 바로 바우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한편 폐교 이후 유럽과 미국으로 이주해간 바우하우스 사람들에 의해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교육이 전세계적으로 전파되었다. 대부분의 미술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색채이론, 그리고 3차원 디자인에 대한 교육은 바우하우스에서 시행되었던 교육실험 덕분이며, 조립식 주택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혁명의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바우하우스의 공헌은 크다. 한마디로 디자인에 대한 사고의 폭을 넓혀 주었고, 오늘날 산업디자인의 양식을 창조하였으며, 현대 건축의 발명에 이바지 하였다는 것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참고
近代 디자인 史 산업혁명에서 바우하우스까지
권명광, 명승수 공저 미진사 1992年
현대 디자인과 조형교육의 기원인 바우하우스 사람들과의 만남
최성운교수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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